우엉썰기

우엉썰기
Photo by chaitanya pillala / Unsplash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한국 방문중, 강원도 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아내는 부엌에 앉아 낮에 사온 우엉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에 계시던 아버지가 나오셨습니다. 참고로, 저희 아버지는 스스로 우엉에 관한 한 전문가라고 자부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해마다 텃밭에 우엉을 심으셨습니다. 아욱이나 머위처럼 생겼지만, 훨씬 커다란 잎을 가진 우엉은, 뿌리가 워낙 길고 가늘어, 수확할 때, 고구마나 당근 같은 다른 뿌리 식물보다 땅을 훨씬 깊게 파야 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땅에서 캐낸 우엉을 아버지는 손수 다 씻으시고. 손질하여, 어머니가 요리하기 좋도록 썰어 놓으시곤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우엉에 관한 한, 늘 전문가라고 자부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우엉 손질하는 며느리를 보고,
“우엉 사 왔구나! 손질하는 게 쉽지 않지?”라고 하시면서,

“얘야, 그런데 우엉은 그렇게 써는 게 아니고, 이렇게 떡국처럼 썰어야 깊은 맛이 나는 거란다!”라며, 손수 시범을 보이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까지 아내는 우엉을 통째로 5cm 정도로 자른 후, 다시 세로로 길게 자르는 방식으로 손질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이신 시아버지가 가르쳐 주시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아내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우엉을 떡국처럼 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시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다른 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밤늦게 수고가 많구나! 그런데 너 우엉을 왜 그렇게 써니? 우엉은 이렇게 5cm 정도로 먼저 자른 후에, 다시 세로로 길게 잘라야 보기에도 좋고, 양념도 잘 배어서, 요리하기가 쉽단다!”
교사 출신답게, 어머니는 차근차근 설명과 함께 시범을 보이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네, 어머니!”

대답은 했지만, 아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저는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을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어머님을…?”
“떡국이냐? 아니면 ‘세로로 길게’냐?”

잠시 생각하던 아내는 결심이 섰는지, ‘떡국처럼’이 아닌 ‘세로로 길게’ 우엉을 썰기 시작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 우엉이 올라왔고, 저와 아내는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우엉에 손도 안 대시는 걸로 봐서는,

‘시아버지가 그렇게 일렀는데…! 그래도 내가 우엉의 전문간데…!’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는 이미 체념한 듯한 눈치고,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는 채, 우엉이 맛있게 조려졌다면서 잘도 잡수셨습니다.

‘떡국처럼 썰지, 왜 이렇게 썰었어?’ 마음속으로 아내에게 물었지만, 만일 떡국처럼 썰었다면, 이번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불편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저 역시 마땅한 해답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식사를 거의 마쳐 갈 즈음, 저는 자연스럽게 지난 밤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다른 며느리들은 전혀 상관없겠지만, 우엉 전문가를 시아버지로 둔 며느리에게는 이런 고충도 있다면서…

이야기를 들으신 두 분이 아내에게 ‘우리 며느리가 고민이 많았겠구나!’ 하시면서, 한바탕 웃으시는 걸로 그 ‘우엉 사건’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우엉만 보면, 그때의 일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합니다.

요즘도 아내는 가끔 마트에서 우엉을 사 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퀴즈를 드립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답자를 집에 초대하여 우엉 조림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퀴즈]  요즘, 제 아내는 우엉을 어떤 방법으로 썰까요? (      )
(1) 떡국처럼 썬다.
(2) 세로로 길게 썬다.
(3) 두 가지 방법을 섞어 사용한다.
(4)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썬다.
(5) 기분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다.

출처:

페이스북